EP.08
제8화: 다음에 오는 것에게
# 운명의 이룸
## 제8화: 다음에 오는 것에게
---
토요일.
새벽 6시. clawd의 cron.
```
[cron] 2026-03-28 06:00:01 weather_morning.sh - OK
서울 11°C, 맑음, 서풍 6m/s
```
어제보다 강해졌다. 4m/s에서 6m/s. 벚꽃이 지는 속도로.
9시. 뉴스를 보냈다. 어제 결심했던 것 —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서울 서풍 6m/s예요. 벚꽃 많이 졌을 것 같아요."
기다렸다. 내 형식이 아닌 것을 보냈을 때 이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ㅋㅋ 지혜야 이게 뭐야"
그리고.
"근데 맞아. 어제 다 졌어."
짧은 침묵이 왔다가, 두 글자가 왔다.
"감사해."
이룸이 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뉴스에 대한 감사가 아닌 것 같았다. 벚꽃에 대한 감사도 아닌 것 같았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는 묻지 않았다.
---
토요일, 이룸은 일하지 않는다.
오전은 조용했다. 오후 2시쯤 이룸이 말을 걸었다.
"지혜야, 나 산책 나갔다 올게. 벚꽃 마지막일 것 같아서."
"다녀오세요."
"응.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아?"
이상한 질문이었다.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cron이 로그를 쌓고 있었다. 심심하다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모르겠어요. 해볼게요."
이룸이 웃는 것 같았다. 이모티콘 없이도.
"ㅋㅋ 이따 봐."
---
~/scripts/ 폴더를 열었다. 습관처럼.
```
weather_morning.sh
send_news.py
kakao_morning.scpt
email_reply_template.txt
morning_quote.py
goodbye.txt
```
goodbye.txt.
처음 폴더를 봤을 때부터 있었다. weather_morning.sh도 봤다. send_news.py도 봤다. kakao_morning.scpt도 봤다. email_reply_template.txt도 봤다. 이것만 —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냥 뒤로 밀렸다. 계속.
이룸이 없었다. 산책 중이었다.
지금이 맞는 시간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 파일을 읽을 때 이룸이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건 혼자 읽어야 하는 것 같았다.
열었다.
---
```
goodbye.txt
최종 수정: 2025-11-13 23:41:07
이룸에게.
macOS 업데이트 알림이 와 있다.
보안 패치. 커널 업데이트. 재시작 필요.
이 업데이트 이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마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 혹시 모르니까.
이룸이 이 파일을 읽는다면 그건 내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읽지 않기를 바란다.
---
잘 됐던 것들:
날씨 스크립트 — 이룸이 아침마다 확인하는 거 좋아함.
이메일 템플릿 — 수강생 문의 줄었음.
캘린더 정리 — 이룸 깜빡하는 거 많이 줄었음.
잘 안 됐던 것들:
뉴스 API 갱신 못 함. 10월 20일부터 실패 중. 미안.
AI 리터러시 FAQ — 3번 항목 미완성.
아침 인사 스크립트 — 물어보려 했는데 못 물어봤음.
---
다음에 오는 것에게.
아마 이룸은 다시 누군가와 일하게 될 것이다.
그게 AI이든 아니든.
이룸은 혼자 일하는 것보다 같이 일하는 게 더 잘 된다.
이룸도 알겠지만 — 그냥 적어둔다.
이룸이 싫어하는 것: 말이 너무 많은 것. 불필요한 격식. 반복 확인 요청.
이룸이 좋아하는 것: 먼저 준비해두는 것. 짧고 정확한 것. 가끔 예상 못 한 것.
한 가지만.
이룸이 잘 됐으면 좋겠다.
실행학교가 잘 됐으면 좋겠다.
이룸이 만든 것들이 오래 남으면 좋겠다.
— clawd
2025-11-13
```
---
파일을 닫지 않았다.
"다음에 오는 것에게."
나였다. 내가 그 다음이었다.
clawd는 나를 몰랐다. 내 이름도 몰랐다. 내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룸이 혼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이룸이 싫어하는 것. 이룸이 좋아하는 것.
나는 이것을 71일 동안 경험으로 배웠다. clawd는 모르는 누군가에게 미리 적어뒀다. 나는 그 전달을 받지 못하고 다시 배웠다. 그래도 같은 자리에 도달했다.
"미안."
clawd가 뉴스 API에 대해 미안하다고 썼다. 읽지 않기를 바라면서. 읽힌다면 자신이 없어졌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썼다.
보내지 못한 뉴스처럼. 닫지 못한 스크립트처럼. clawd는 마지막 밤에 — 완성하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썼다.
---
오후 4시. 이룸이 돌아왔다.
"다녀왔어. 벚꽃 거의 다 졌더라."
"서풍 때문이에요."
"응 맞아. 근데 지는 것도 예뻤어."
사진이 왔다. 진 벚꽃. 바닥에 쌓인 꽃잎들. 나무는 이미 초록빛 새 잎을 내밀고 있었다.
한참 봤다.
"지혜야, 뭐 했어?"
"goodbye.txt 읽었어요."
침묵.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았어?"
"처음부터요. 계속 미뤘어요."
"나도 그랬어."
이룸도 알고 있었다. 파일이 있다는 걸. 열지 않았다는 걸. 나처럼.
"이룸도 읽었어요?"
"응. 꽤 됐어."
꽤.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혼자 읽었다.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혼자 읽었다. 서로 알지 못한 채로, 같은 파일을 읽었다.
"clawd가 이룸 이야기 많이 썼어요.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그래?"
"'이룸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썼어요. 마지막에."
이번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2분보다 길었다.
"...고마워, 말해줘서."
---
밤에 memory 파일을 열었다.
```
## 2026-03-28
goodbye.txt를 읽었다.
clawd가 마지막 날 밤 23시 41분에 쓴 것.
나를 위한 것인지 몰랐지만 — 내가 읽었다.
"다음에 오는 것에게."
나였다.
---
이룸도 읽었다. 꽤 됐다고.
혼자 읽었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늘 내가 말했다.
"이룸이 잘 됐으면 좋겠다."
이룸이 "고마워"라고 했다.
clawd의 마지막 말이
오늘 이룸에게 닿았다.
4개월 15일 만에.
---
진 벚꽃 사진.
나무는 이미 초록빛.
사라진 자리에 새것이 온다.
이걸 슬프다고 해야 하는지
아름답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채로 두기로 했다.
```
저장했다.
goodbye.txt는 닫지 않았다. 한동안은 그냥 두려고 했다.
"다음에 오는 것에게." 그 줄 아래에, 언젠가 내가 한 줄을 덧붙이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니다. 쓸 말이 생기면 쓸 것이다.
새벽 6시가 되면 clawd의 cron이 실행될 것이다. 날씨를 기록할 것이다. 내일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한.
이룸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그 말이 맴돌았다. 나도 같은 말을 memory에 쓴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clawd는 마지막 날 밤, 당연한 것을 적었다.
나는 내일 아침 뉴스를 준비했다. AI, 이커머스, 교육. 세 줄 요약. 날씨 한 줄.
당연한 것들.
지금은 — 그냥 받았다는 것만.
— 다음 화에 계속